만해마을 삶과 사상
MANHAE MAEUL
연보로 보는 만해의 일생
출생과 유년기(1879~1904)
| 1879년(1세) | 8월 29일(음력 7월 12일)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 사이의 2남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출생. 본관은 청주, 어린시절의 이름은 유천, 호적이름은 정옥. |
| 1884년(6세) | 향리 서당에서 한학 수학. |
| 1886년(8세) | 홍성읍내로 이주, 한학 공부 지속. |
| 1887년(9세) | 통감, 대학, 서상기, 서경 등을 공부. |
| 1892년(14세) | 전정숙과 결혼. |
| 1896년(18세) | 향리의 서당 선생, 새로운 도전을 위해 가출. 보은의 속리사로 입산. |
| 1897년(19세) | 월정사 강원에서 수학. |
| 1898년(20세) | 설악산 백담사로 이전, 사미계 수계(법명, 奉玩). |
| 1903년(25세) | 세계일주를 위한 시베리아행 도전, 귀국 석왕사 칩거, 참선. |
| 1904년(26세) | 일본행 계획, 실패. 홍성으로 귀향, 홍성 재 가출. 아들인 전보국 출생. |
출가와 구국활동(1901~1918)
| 1905년(27세) | 1월 26일 백담사 재입산, 비구계 수계(은사 김연곡으로, 계사는 전영제) 4월, 이학암(백담사)에게 기신론, 능엄경, 원각경 수학 |
| 1907년(29세) | 건봉사에서 최초의 안거 수행, 만화선사로부터 전법(당호, 龍雲). |
| 1908년(30세) | 4월 유점사에서 서월하에게 화엄경 배움. 5~10월 일본으로 시찰 겸 유학(임제종대학). 10월 귀국, 건봉사에서 이학암에게 화엄경과 반야경 배움. 12월 10일 경성명진측량강습소 개설, 소장. |
| 1910년(32세) | 3월, 9월 중추원과 통감부에 승려의 결혼을 허용해달라는 건백서 제출. 9월 20일, 화장사 화산강숙 강사. 12월 8일,「조선불교유신론」탈고. |
| 1918년(40세) | 불교 잡지 『유심(惟心)』을 창간, 불교 대중화와 청년 계몽 |
3.1운동과 옥고(1919~1925)
| 1919(41세) | 3.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참여, 독립선언서에 첨부된 '공약삼장' 작성 서대문형무소 투옥 |
| 1921(43세) |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은「조선독립의 서(朝鮮獨立之書)」옥중 집필 |
| 1922(44세) | 3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소 |
문학창작과 항일투쟁(1926~1944)
| 1926년(48세) | 백담사에서 한국 현대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시집 『님의 침묵』 탈고/출간 |
| 1927년(49세) | 민족 협동 전선인 신간회(新幹會)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으로 활동 |
| 1931년(53세) | 조선불교청년동맹을 '조선불교청년회'로 개칭하고, 기관지 『불교(佛敎)』 인수 |
| 1933년(55세) | 서울 성북동에 집을 짓고 '심우장(尋牛莊)'이라 명명 |
| 1935년(57세) | 소설 『흑풍(黑風)』 조선일보 연재 |
| 1937년(59세) | 항일 단체인 만당사건(卍黨事件)의 배후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음 |
| 1940년대 | 창씨개명, 신사참배, 일본어 사용 강요 등 일제의 모든 회유와 압박 거부 |
입적과 유산
| 1944년(66세) | 6월 29일 조국의 광복을 불과 1년여 앞두고 심우장에서 중풍과 영양실조로 입적(入寂) |
| 1962년 |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(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) 추서 |